珍
438年, 贊の 뒤를 이어 王位에 오른다. 宋に使臣を 보내 자신을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으로 自称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宋에게 要請하나 거절당하고 安東將軍倭國王の職位만 수여되었다.
百濟の腆支王が 20여 년 전에 下賜 받은 작위는 鎭東將軍이므로 安東將軍と鎭東將軍の等級は 4단계 차이다.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 순서다. 百濟 또한 南朝와 交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정을 알고 있는 宋이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濟
443年 宋에 使臣を 보내 安東大將軍倭國王の地位を 받았다. 이후 451年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에 任命되었다.(任那と加羅は同国으로써 任那加羅라고 하나의 국가라고 지칭하지, 두 개의 나라라고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六国이 아니라 五国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中国皇室에서 대충 具色 맞추기로 認可 해줬다는 根據だ) 앞에서 倭王珍が 요구했던 이름과 비슷하지만 百濟 하나만 빠진 バージョン인데, 이미 百濟は中国の南朝と黄海を 건너 交流を 많이 하고 있었고 425年에 使持節都督鎭東大將軍百濟諸軍事職位を 받았기 때문에, 宋에서도 倭国が 주장한 칭호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新羅와 任那加羅 등은 中国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아직 交流が 많지 않았기에 中国 측에서 이미 中国と關係を 맺은 倭国과의 關係を 우선시 여겼기 때문에 受諾한 것이다.
武
倭王興の 동생으로, 興が 사망하자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고 自称했다. 인정해 줄 것을 宋に要請했지만 이번에도 百濟は 빠지고 六國諸軍事로 수정해서 받게 된다. 이 역시 中国과 가까운 영토가 없는 新羅나 任那加羅は 中国과 交流が 거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中国 측이 잘 몰라서, 일단 자기들도 잘 알고 확실한 關係を 가지고 있는 百濟は 뺐고, 新羅나 任那加羅は倭国の 주장대로 넣어버리고 受諾한 것이다. 다만 任那加羅は479年에 荷知王が 처음으로 中国에 使節団を 보내기 때문에 적어도 任那加羅が倭国の屬国が 아니라는 것을 479年에는 中国も 알게 되었을 것이다.
荷知王
中国の歴史書 《南齊書》 蠻東南夷傳에 등장하는 任那加羅の王. 479年에 여러 나라의 使臣과 더불어 폐백을 바쳤고, 이에 輔國將軍本國王으로 除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本國王 《南齊書》 권58 列傳 제39 蠻東南夷傳
日本人が好きな中国の高句麗研究学者王健群は韓国の国内学会に 참석해, 倭王が自称한 爵位は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百済と新羅, 任那加羅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는 것은 倭が統治한 사실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대에 朝鮮半島の南部에는 百済と新羅, 任那加羅만 존재했는데加羅と任那を別個の国家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指摘했고, 이는 자신이 自称해서 다스리는 国の實情も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價値も 없다고 말했다.
『宋書』 夷蠻列傳倭國條에 따르면, 倭王武を 비롯한 5명의 倭王が5世紀에 걸쳐 宋に 지속적으로 倭は 물론 百済와 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등 朝鮮半島の南部 일대의 여러 세력의 군사권을 관장하는 都督の官爵を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송은 끝까지 百済에 관련된 官爵を 인정해주지 않았다. 즉 당시 百済와 交流を 하던 宋으로서는 百済が倭に 군사적·정치적으로 속한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에 新羅나 任那加羅 등은 中国 측과의 직접적인 交流が 드물어서 이러한 사정을 잘 몰랐던 탓에 나머지의 官爵は 순순히 허락을 해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당시 倭王が除授받은 "安東大將軍"は百済王が除授받은 "鎭東大將軍"과 견주어 볼 때에 같은 2품이기는 하되, 서열은 百済王が除授받은 鎭東大將軍が上位였다. 『宋書』 倭國條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러한 安東大將軍の官爵は倭王が 스스로 청한 것인데, 스스로 百済に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宋に 청했던 官爵が百済보다 下位였다.
이후에 倭王は南齊로부터 479年に鎭東大將軍を, 502年に梁으로부터 征東將軍を 받았는데, 이는 倭が 실제로 中国の南朝に使臣を 파견했기 때문에 받은 官爵が 아니라, 中国の南朝 측에서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기념으로 의례상 내려준 것에 불과했다. 더욱이 百済は倭が 479年に받은 鎭東大將軍を 훨씬 앞선 420年に 받았으며, 倭王が征東將軍を 받은 502年에는 征東大將軍を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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