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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Nationalism/Text

[개소문닷컴] 독도의 논리와 반박 (獨島の論理と反論)

by ツララカララ™ 2012. 8. 26.
독도의 논리와 반박

일본측 주장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지증왕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
다. 우산국은 명주(현 강릉)의 정동 쪽의 해도에 있어 혹은 울릉도라고도 하거니와, 땅이 사방 100리로, 천험
을 믿고 신라에 귀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되,‘우산국 사람은 어
리석고도 사나워 위세로써 내복하게 하기는 어려우나 계교를 써서 항복받을 수는 있다.’하고,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
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이라고 나오지만, 그 어디에도 우산국의 자세한 영토 범위가 나오지 않음은 물론, 다케시마 또는 독도
에 대한 기술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 독도가 신라에 귀속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박

우산국은 울릉도를 비록한 울릉도의 부속섬 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독도도 우
산국의 일부이며 이것이 신라에 편입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독도가 신라의 영토로 편입 된 사실은 한국측 사료 뿐
만 아니라, 일본측 사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7세기 일본 고지도,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의 영토로 표기하였다.]

[7세기 독도를 신라땅으로 표기한 일본 고대지도를 토대로 1662년 일본 교도에서 서양의 측지법을 적용해 다시 제작된
지도, 울릉도와 독도가 안도(雁道)로 표기돼 있다.]

일본측 주장

세종실록지리지나 고려사에「육안으로 보인다」를 영토 주장의 근거로 따지면, 일본영토인 쓰시마에서도 한국의 부산
이 보이며, 미국본토에서는 미국령인 하와이 열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부산은 일본의 영토이고, 하와이는 미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인다, 또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이 영유권 주장의 근
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박

세종실록지리지나 고려사에 나오는 문장에 날씨가 맑은 날이면 울릉도와 독도가 서로 보인다는 것은 그 만큼 두 섬이
각별하다는 뜻이며 또한 세종실록지리지나 고려사에 그 문장을 넣은 것은 타국의 영토가 아니라, 자국의 영토이기 때문
에 세종실록지리지와 고려사에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지지나 만기요람을 비록 여러 기록에서는 이
두섬이 우산국의 땅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일본도 역시 울 릉도와 독도가 각별한 사이임을 알고 기록이나 고지도에
표기하였습니다. 또한 우산도가 독도라는 사실은 일본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날씨가 청명하면 울릉도에서 독
도가 보인다는 기록 역시 일본 측 사료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이 두 섬은 조선의 영토임을 표시하였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날씨가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다.]

[서계잡록:
대개 두 섬이 그다지 멀지않아 한번 큰 바람이 불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이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
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만기요람: 여지지에 이르기를 우산, 무릉 모두 우산국 땅이다. 우산은 일본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

[일본 고기록「 이나바지 」: 우산도는 일본말로 송도[松島]이다.]

[한국 고지도: 해좌전도]

[일본 고지도「 조선국세경전도 」에는 독도를 우산도로 표시하였으며
과거 일본은 우산도가 독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일본지도: 죽도송도지회도]

일본측 주장

은주시청합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라는 표현 자체는 이 두 섬은 무주지이나, 일본에서 이 두 섬의 거리가 상당해서
행정권을 갖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계가 오키섬이여도, 이는 마쓰시마나 다케시마를 조선령으로 인정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박

은주시청합기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 이 두 섬(현재의 울릉도와 독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에서
보기에는 운주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 뜻은 운주와 은주는 모두 일본의 영토이므로 울릉도와 독도는 사
람이 살지는 않지만 이 두 섬은 운주가 은주를 같은 일본의 영토로 보듯이 고려의 영토이다라는 뜻입니다.

[은주시청합기]

일본측 주장

에도(江戶)시대 초기(1618년), 돗토리번의 요나고 주민인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양가는 막부로부터 울릉도 도해
(渡海)면허를 받아 울릉도에서 독점적으로 어업을 하며 전복을 막부 등에 헌상하였습니다. 즉, 일본은 울릉도로 도해하
기 위한 항해의 목표나 도중의 정박장으로, 또는 강치나 전복 포획의 좋은 어장으로 독도를 이용하여 늦어도 17세기 중
엽에는 독도의 영유권을 확립했습니다.

반박

도해 면허 허가증은 자국의 영토라면 발행할 필요가 없으며, 타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행한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조
선 정부는 자국의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쇄환정책을 하여 무인도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측에 통보
없이 조선의 영해를 침범하여 일본이 불법 어류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용복 사건으로 일본은 더이상 울릉도와
독도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일본의 돗토리번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어느 지방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에도막부는 이후 울릉도 도해 금지를 합니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울릉도만 도해 금지하여
도 독도도 도해 금지가 됩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일본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
였습니다.

[도해면허: 도해면허는 자국의 영토라면 발행 이유가 없고 타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행한 것이다.
즉, 지금의 여권에 해당이 된다.]

[1696년 원록9병자년 조선주착안지각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강원도에 속한 섬임을 기록하였다.]

[원록9병자년 조선주착안지각서: 안용복의 진술을 받아 적은 기록에는 죽도(竹島=울릉도)와 조선 사이는 30리
(海里),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 사이는 50리(海里)라고 합니다. 라고 안용복의 진술한 내용이 기
록되어 있다.]

[돗토리번 보고서 기록: 독도[松島=마츠시마]는 두 나라(=돗토리번의 두 지방) 소속이 아닙니다. 울릉도[竹島=다케시
마]에 도해(渡海=바다를 건너)하는 길목에 있는 섬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어떤 지방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죽도송도지도]

[울릉도도해금지령: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울릉도만 도해금지를 하여도 자동 도해금지가 된다.]

[확대]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 한반도 일부 즉 경상도를 나타내 조선의 영토임을 표시]

[겐로쿠일본도: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 한반도를 제외하여 일본 열도만 표시. 즉, 그 뜻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이
지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확대]

[조선국전도: 한반도 전체와 울릉도와 독도를 표시 즉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다.]

일본측 주장

하치에몬이 다케시마까지만 가고 울릉도에는 가지 않았다면 처형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치에몬의 기록에는
송도[松島]에 간다는 명목으로 울릉도에 간다고 하면 어떨까? 라고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반박

그것은 하치에몬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하치에몬의 생각에서는 타국의 영토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이고 가치가 없으니 가도 봐주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치에몬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와 독도를 가게
해준다면 막대한 국익 될 것이라고 제안을 하였지만, 에도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치에몬은 정부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울릉도로 도해하여 체포가 되었는데, 하치에몬이 처형 받기
전 하치에몬이 직접 작성하고 진술한 기록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 빨강색을 입혀 표시하였습니다. 따라
서 하치에몬은 독도에 갔었도 처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치에몬의 사건으로 에도 막부는 도해금지 경고판
을 설치하고 도해금지를 다시 하였습니다. 도해금지 경고판을 보면 울릉도를 비롯한 오른쪽 섬도 도해금지를 하고 있는
데 이것을 하치에몬이 진술 중 작성한 기록을 보면 오른쪽 섬은 독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치에몬이 직접 작성한 진술 기록 「 1836년 울릉도도해[渡海]일건기 」: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과 같은 빨강색, 일본
은 노랑색 즉, 독도는 조선의 영토]

[도해금지경고판: 하치에몬이 처형 당하고, 다시 울릉도를 도해하는 일본인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에도막부의 명령에 따라
곳곳에 설치한 목판 중 일부이다. 이 목판에는 울릉도 뿐만 아니라, 오른쪽 섬까지 도해금지를 하고 있다. 이것을 하치
에몬이 심문 중 직접 작성한 문헌의 지도와 도해 금지 목판을 같이 보게 된다면 오른쪽 섬은 독도임을 알 수 있다. 즉, 울
릉도와 독도가 도해 금지인 것이다.]

일본측 주장

태정관 지령문은 울릉도와 외 1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는 영토이니 명심하라고 되어 있지만 외 1도는 독도가 아닙니다.

반박

태정관 지령문 이전에 메이지 유신 또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부속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더구나 태정관 지령문에 5
페이지를 보면 외 1도는 송도[松島] 즉, 독도라는 기록이 있고 태정관 지령문에 첨부 지도인 기죽도약도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울릉도 독도 조선부속2상성후시말]

[태정관 지령문: 울릉도와 외 1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으니 명심하라.]

[태정관 지령문 5페이지: 1도는 송도(松島=독도)이다.]

[기죽도약도: 울릉도와 독도 이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리 간에 표시도 하였다.]

일본측 주장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따르면「울릉도를 울도로 이름을 바꾸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
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소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중에 편입하고 관등은 5등으로 할 일 제2조 군
청위치는 대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역시 그 어디
에도 독도의 명칭이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죽도 또는 석도가 다케시마라면, 위도 경도가 정확히 제시되었어야 합니
다. 또한, 다케시마를 제외한 울릉도에는 부속 도서로, 현재 죽서도, 관음도로 불리는 두 섬이 존재합니다. 즉, 죽도, 석
도는 이 두섬을 지칭하는 명칭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죽도, 석도를 독도라고 여기는 행위는 제주도에 부속도서가
쓰시마섬이라고 주장하는것과 거리상으로 봐도 다를것이 없습니다.

반박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에 나오는 석도[石島]는 독도입니다. 석도가 독도라는 증거는 방언과 대한제국 칙령 제 3호를 보
면 명확히 답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한자로는 석도[石島]지만 발음으로 하면 돌섬입니다. 또 한 돌섬이면서도 혼자 있다
하여 발음 돌과 홀로 있기 때문에 적합한 명칭으로 독도[獨島]가 된 것이고 이것은 다른 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입
니다. 또한 대한제국 칙령 제 3호를 보면 독도는 울릉도 바다 밖 100여리에 위치 한 섬이라고 기록 되어 있으며 울릉도의
소속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울릉도 바다 밖에 100여리를 지나서 위치한 섬은 독도 뿐입니다. 또한 독도가 대한제
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유럽 국가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따라서 국제법적으로 독도를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

[대한제국 칙령 제 3호: 독도는 울릉도 바다 밖 100여리에 지나서 위치하고 독도는 울릉도의 소속이라고 밝히고 있다.]

[울릉도 바다 밖 약 100여리를 지나서 위치한 섬은 독도밖에 없다.]

[신문기사 기록: 1895년에 독도는 과거 돌섬[石島]라고 불렀으며 울릉도에서 약 200리에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또한 날
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어렴풋이 보인다는 것과 두 개의 섬이고 강치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울릉도에서 약 200
리에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두 개의 섬이고 강치가 있었던 섬은 독도 뿐이다.]

[확대]

[1904년 유럽 국가인 프랑스가 제작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강원도 일부 임을 보여주고 있다.]

[1903년 일본 고지도]

[1905년 한국전도: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표시하였다.]

일본측 주장

1905년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은 영유의사의 재확인이였으며 일 본의 독도 편입 사실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905년 편입당
시 일본은 1905년에 한국에 "공식적"으로 독도에 있는 무인도를 자국령으로 하겠다는 것을 조선 조정에 "통고"를 했습니
다. 만약 조선이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었다한다면 당연히 이를 "외교적으로 저항"했었다는 사실이 존재했어
야 합니다. 헌데 그런 사실 자체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습니다.

반박

무인도라고 하여도 무주지가 아니며 또한 독도는 무주지가 아닌 대한제국의 영토이였습니다. 이 사실은 일본도 알고 있
었던 사실입니다. 또한 대한제국은 처음에 일본의 의도를 잘 알지 못했으며 1906년에 되서야 최종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강탈한 사실과 의도를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독도는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밝혔습니다. 즉 일본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
토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영토인 독도를 강탈한 것이며 대한제국의 영토이였던 독도를 일반적으로 무주지로 선정
하여 불법 편입한 것입니다. 1906년, 이 사실을 접한 울릉군수 심흥택은 일본 관리단들에게 독도는 울릉도의 소속이라고
밝혔고 대한제국 칙령 제 3호를 통해 이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에게 보고를 하였는데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독도 편입
사실은 사실 무근, 일본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즉 대한제국은 1906년까지 일본의 의도를 모르고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관하여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독도 편입은 불법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의 권리를 박탈한 상태이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항의를 묵살 하
였고 또한 일본은 대한제국이 항의를 하지 못하도록 군사적인 위협과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 증거는 대한제국 칙령 제 3
호를 보면 알 수 있으며 또한 일본이 군사적 위협과 협박을 하였다는 사실은 헤이그 특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
니다. 또한 고종황제는 밀서를 통해 기록을 남겼는데 고종황제는 모든 권리를 타국에게 양보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습
니다. 모든 권리에는 영토에 관한 주권과 더불어 영유권도 포함 되어 있기에 따라서 독도는 대한제국의 영토이므로 대한
제국의 영토 주권 범위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결코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영토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
다. 즉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협박으로 인하여 항의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이후에
독도는 물론 한반도 전체까지 강제병합하고 식민지배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독도 편입은 불법이며 무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