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한 한국인을 읽고
종로 2가에 있는 ‘알라딘’ 이라는 중고 서점을 가끔 간다.
헌 책방의 퀴퀴한 냄새는커녕 산뜻한 분위기가 꽤 하이칼라다.
눈에 번쩍 띄게 희귀한 책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몇 만원씩 내기 아깝고,
지역 도서관에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책을 단돈(?) 몇 천원에 살 수 있다.
며칠 전 이리저리 구경하던 중 ‘추한 한국인’이란 제목을 보게 되었다.
옛날 (확인하니 1993년이다) 그런 이름의 책이 시끄럽던 기억이 나고,
값도 2,000 원이라 선뜻(?) 구입했으니, 이 글은 그 독후감이다.
醜い韓国人
제목 그대로 ‘추한’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추’는 醜 다.
가을 秋가 아니라 추접할 醜다.
나도 한국인 추접스럽다고 생각할 때가 가끔-아니 아주 자주 있다.
한국인의 추접스러움에 대하여는 한국인이 쓸 수도 있고,
일본인이 쓸 수도 있고, 그 어느 나라 사람도 쓸 수 있다.
누가 쓴 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책 ‘추한 한국인’은 일본인이 한국인 인 척 하며 썼다는 점이 문제다.
저자 이름은 박태혁 이라고 나와(?) 있고 (실은 가공 인물),
표지 이면에 나온 박태혁의 약력은 1928년 한국 경기 출생,
서울대학 중퇴다.(책 도중에 경성 제대 입학했다는 부분이 있다)
신문기자를 거쳐 평론가, 한국 유력지의 도꾜 특파원을 지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 쓴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의 약점을 까발렸다고 일본인이 썼다는 말이 아니다.
한국인이라고 자기 나라 약점 이야기 왜 못 하나?
일본어로 처음 나오고, 일본에서 화제가 되니 한국어로 번역했다.
한국어로 번역/소개한 쪽에서는 ‘가세 히데아키(加瀨英明)’라는 인물이
한국인 ‘박태혁’을 가장하고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세 히데아끼’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를 저자라고 추론하는 과정이 꽤 그럴 듯 하다.
왜 ‘가세 히데아끼’는 굳이 한국인 박태혁을 가장했을까?
일본인이 ‘한국인 추하다’ 하는 것보다,
한국인 쪽에서 ‘야 우리가 봐도 우린 정말 추하다!’ 하는 쪽이
책 팔아 먹기 훨씬 편하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이 어떤 점에서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 쓴 것인가?
에 대하여는 (한국어 번역)책에 해설이 나오지만,
재일 동포가 논증한 듯 한국인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부분을
정작 놓친 것이 꽤 있다.
또 ‘추한 한국인이 일본에게 답한다’ 라는 책이 나란히 있는데,
값이 1,100원 밖에 하지 않아 같이 샀다.
‘추한 한국인’에 대한 반론인데, 훑어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항목 별로 조목조목 단답형에 가깝게 해도 될 일을
‘너희들 일본인 잘 못한 거 무지 많잖아!’ 라고
‘거대담론’ 으로 흘러 버리니, 비록 내용은 맞더라도,
제대로 된 반박은 아니다 라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 이건 일본인이 썼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점 몇 가지에 대하여 써 보기로 한다.
1. 나리님? 아씨님?
상인은 양반을 깍듯이 ‘나으리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자 아이면 ‘아씨님’이라고 불리어... (醜い韓国人 p66)
‘나리님’, ‘아씨님’은 왕 뒤에 님을 붙여 ‘왕님’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으음 요즈음 세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이거 비싸세요’ 라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정도니까.
이 글 쓰며 신문을 보니 대통령님, 장관님 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그러나 내 나이 이상 더욱이 1928년 생(生)이 나리, 아씨 뒤에 님을 붙일까?
일본어 원문을 보지 않았으니, 번역하며 님이 붙었는지? 그 점은 알 수 없다.
2. 태어난 마을에 대한 서술
“마을은 면(面)이란 행정 단위로 불려 지고 있으며 1만 명 가량이 살고 있다”
(醜い韓国人 p65)
일제 시대 대략 인구 1만 명 정도의 면 단위 설정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여러 마을이 모여 한 면이 1만이지, 달랑 하나의 마을이
만 명이란 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 1만 명이면 웬만한 읍(邑)보다도 크다.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큰 농촌 마을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서술에서 계속 무리가 나타난다.
‘마을은 이조 시대부터 한국 사회의 특권 계급으로 지내 온 양반(兩班)들이
사는 구역과 중인(中人)이 사는 구역, 그리고 상인(常人)이 뭉쳐서 사는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醜い韓国人 p65)
중인(中人)은 이방(吏房), 호방(戶房) 등 아전(衙前)이나 의원(醫員)이다.
도시-읍(邑)에서 사는 사람들이지 시골 마을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일제 시대 조선에서 양반, 중인, 상인이 뒤섞여 살던 농촌 마을이 있었을까?
마을 서술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양반, 중인, 상인이 사는 곳이 선을 그어 놓을 정도로 확실하게 나뉘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의 집이 많은 구역에도 중인이나 상인의 집이
섞여 있었다. (醜い韓国人 p65-66)
이건 농촌 마을이 아니라, 한성 곧 일제 시대 경성에 대한 서술이다.
한성에는 양반, 중인, 상인이 있었고 대체적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을 그을 정도로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골은?
우리 고향은 양반과 상민(常民)은 동네 자체가 달랐다.
종-가내 노비(家內奴婢)야 양반 동네에서 살았지만,
서술 중 천민(賤民)에 대한 부분이 별도로 또 있다.
또한 중인(中人)은 읍(邑)이나 큰 도시에 살지, 농촌에 있을 일이 없었다.
l 일제 시대 면 단위가 대략 1만 명이라는 부분,
l 전통 시대 조선의 계급을 양반, 중인, 상인, 천민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분류가 꼭 정설은 아니지만)
l 서울-한성에는 이 네 부류가 섞여 살았다.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가공의 농촌 마을을 상상하다 보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듣보잡’ 마을이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일제 시대 살았거나, 살지 않았더라도 일제 시대 살았던 분들의
말이라도 들어 보았다면 나올 수가 없는 서술이다.
‘우리들의 마을은 양반이 마을 주민 가운데서 3할이고,
중인이 4할, 상인이 3할로 구성되어 있었다” (醜い韓国人 p66)
뭘 어떻게 놓고 분류한 것인지 모르겠고,
또 각각 3, 4, 3할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그게 설사 맞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로 보면 모를까,
개별 향촌 마을에서 저런 구성비로 나누어 질 수는 없다.
…이조 시대에 양반과 상인 사이에 중인(中人)이란 계급이 있었다.
5-6대에 걸쳐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양반이 이에 해당 되었다…
(醜い韓国人 p124)
중인을 이렇게 해설하는 경우는 또 처음 본다.
중인은 아전이나 의원, 역관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중인이 4할이나 되는 마을에서 살았다면 모를 수가 없다.
3. 양반은 지주, 상인은 소작인?
“…상인은 거의 소작인이고, 양반의 대부분은 지주였다…”
실제로 겪어 보지 않고, 머리 속에서 그려 낸 서술이다.
양반 중에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양반 못 살면 상인(常人)보다 더 비참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아도 옛날 어른들 이야기 들어 본 사람은 다 안다.
더 웃기는 것은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 상반되는 서술이 나온다.
“양반 계급의 인구가 터무니없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극빈에
빠져서 강탈과 착취로 생활해 나가야 했다.” (醜い韓国人 p186)
비슷한 이야기가 몇 군데 더 나온다.
토막토막 얻어 들었으나, 머리 속에서 종합이 되지 않은 채
되고 마고 쓰다 보니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일 게다
4. 고등학교
“….이를 악물고 자식을 고교나 전문학교, 대학 또는 제국대학(帝國大學)에
보내려고 노력했다….” (醜い韓国人 p74)
이 부분 고교는 마치 오늘날 고등학교를 떠올린다.
그러나 구 일본의 고등학교는 독일 김나지움(Gymnasium)을 본뜻 것으로
‘제국대학’의 예비교 내지 교양학부 격이니 오늘날 고교와는 달랐다.
구제(舊制) 고등학교는 일단 들어가면 깔린 트랙을 따라 거의 모두
‘제대(帝大)’에 진학했다. 일본 본토에도 몇 되지 않았고, 식민지 조선에는
있지도 않아서 경성제대에 예과(豫科)를 두어 고등학교 역할을 하게 하였다.
1928년 생이 1945년 이전에 경성제대 입학이라?
나이상으로 가능은 하나, 들어가도 본과가 아니라 ‘예과(豫科)’ 일 텐데
구제(舊制) 고등학교가 뭔지 잘 모르는 듯한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또 박헌영이 경성제대 출신 운운 구절이 있다.
남노당 당수 박헌영은 경성제대 출신이 아니다.
해방 전 조선인으로 경성제대에 들어간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이며,
박헌영이 또 좀 유명한가? 그런 사람이 선배인지 헷갈린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일제 시대 경성제대에 들어간 사람일 리가 없고,
일본인이라도 전쟁 전(前)이 아니라 전후(戰後) 세대일 것이다.
5. ‘때놈’은 때가 많은 놈?
요즘 세대는 ‘때놈’의 ‘때’ 어원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내 나이 이상 1928년 생 그것도 당대 제일의 인텔리가
‘때’란 ‘되(胡)’고, ‘때놈’은 ‘되놈(胡人)’이라는 것을 모를 수는 없다.
그런데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한국인은 중국인을 ‘때놈(土+后 奴)’으로 부르면서 멸시한다.’
중국인은 잘 씻지 않으니 몸에 ‘때(土+后)’는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많아 ‘때놈’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
6. 서울대 교수
“서울대 교수의 대다수는 학생이 목전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허락한다거나
소형차를 손수 운전하면서 통근한다거나, 자신이 물을 끓여 차를 마신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醜い韓国人 p146)
담배 문제는 요즘 어떤지 잘 모르겠다.
우리 때는 선생님 앞에서 담배 빼어 물기 어려운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때도 맞담배 해도 괜찮다는 분이 더러 계셨고,
상대(商大)나 공대(工大)같이 유학을 많이 다녀온 데는 비교적 리버럴 했다.
소형차 손수 운전?
나는 서울대 교수를 꽤 많이 아는데, 모두 손수 운전한다.
차종은 대형도 있고 소형도 있다.
책이 나오던 1993년 당시에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茶)?
나 대학 다닐 때-그야말로 도제(徒弟) 제도 냄새 물씬 날 때도,
선생님들이 직접 차 끓여 드셨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 수 없다.
서울에서 서울대 교수를 직접 본 사람이 쓴 글일 수가 없다.
7. 35대조(代祖) 이름을 외운다?
“오늘날에도 양반 가계의 사람이면 보통 자기로부터 35-6대 앞까지의
조상의 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외울 수가 있다.
서민도 5대 앞의 선조(先祖)의 이름은 알고 있다” (醜い韓国人 p194)
이 부분 읽다가, 내가 몇 대조까지 이름을 아나? 생각하니 증조부까지다.
그 이상은 족보를 뒤져 봐야 한다.
우리 집이 별 대단한 집안은 아니나, 양반의 후예라는 의식은 있다.
(자의식(自意識)이 꼭 실제에 비례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머리 속에 증조부 이름까지밖에 없다.
내 아들은 내 이름이야 알 테지만,
할아버지(나의 아버지) 이름부터 버벅거릴 것 같다.
숭조(崇祖)사상 여부보다, 조상의 휘(諱)를 부를 일이 없다.
어디 산소 할아버지, 무슨 당호(堂號)를 대면 알지만, 이름은 모른다.
35-6대 올라가는 조상의 이름 줄줄 외우는 사람을 일찍이 만난 적이 없고,
5대조까지 이름 제대로 아는 사람도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부분 한국인이 치는 ‘개구라’에 넘어간 사람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8. 제사 관련
….증조부의 부인은 남편에게 높은 관위가 있으면 ‘현 고조비 유인
밀양 박씨 숙부인 신위(顯高祖비孺人密陽朴氏淑夫人神位)’가 되었다…
(醜い韓国人 p219)
신주, 지방 이야기인데, 증조부의 부인은 ‘고조비’가 아니라 ‘증조비’다.
이건 단순 실수로 볼 수 있지만, 한국인이 증조모를 증조부의 부인이라고 할까?
문제는 유인 밀양 박씨 숙부인 부분,
유인(孺人)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부인이고,
숙부인(淑夫人)은 외명부(外命婦)의 품계로, 고위 관료의 부인이다.
곧 한 사람이 유인(孺人)이면서 동시에 숙부인(淑夫人)일 수는 없다.
젊은 사람도 아니고, 1928년 생 그것도 숙부인 후손이 모를 수는 없다.
어동서육(魚東西肉) 동두서미(東頭西尾)
제사 진설 설명하면서 나온 용어인데, 한국인들은 관행적으로
(어동서육이 아니라) 어동육서(魚東肉西), (동두서미 대신) 두동미서(頭東尾西)라고 한다.
권잔(勸盞)? 첨잔(添盞)?
(초헌, 아헌, 종헌 이야기가 나오다가)… 마지막으로 권잔(勸盞)이라고 해서
조상에게 술을 권한다. (醜い韓国人 p221)
권잔(勸盞)이란 첨잔(添盞)을 말하는 것 같다.
초헌, 아헌, 종헌 자체가 조상에게 술을 권하는 행위인데
초헌, 아헌, 종헌 뒤에 술을 마치 처음 권하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제사 직접 지내 본 사람이 아니라 한국인 누군가로부터
어설프게 제사에 대하여 들은 외국인이 쓴 글이다.
….장례식을 초장(初葬)이라 부르고, 2주기가 재장(再葬),
3주기가 삼년장(三年葬)…. (醜い韓国人 p222)
위 초장, 재장, 삼년장은 각각 초상(初喪), 소상(小祥)
대상(大祥) 또는 삼년상(三年喪)을 말하는 것 같은데,
한국인이라면 이런 용어가 헷갈릴 수는 없다.
…빈소에는 죽은 사람의 관이 묻힌 묘혈(墓穴)의 흙을 담은 종이 상자가
안치되어 있다. 상자의 위쪽에 ‘상(上)’이란 글자가 씌어진 종이 조각이
세워져 있다. 매일 이 흙에 청주를 붓는다…. (醜い韓国人 p223)
요즘 한국인도 빈소 구경 못 해본 사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 가만히 있어야지 마치 본 것처럼 엉뚱한 소리 해 대기는.
우리나라 어느 빈소에서 흙을 담은 종이 상자를 안치하나?
‘상(上)’이란 글자가 씌어 진 종이 조각이란 혼백(魂帛)을 말하는 것 같다.
정식 신주(神主)는 삼년상이 끝난 뒤 나무를 깎아 만들고,
그 때까지는 명주나 모시 또는 종이를 접어 혼백을 만들어 빈소에 모셨다.
혼백을 접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눈썰미 좋아야 간신히 따라 할 수 있다.
혼백 위에 ‘상(上)’이란 글씨를 쓰는 것은 맞지만
묘혈의 흙을 담은 종이 상자 위에 둔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고,
더욱이 그 흙 위에 매일 청주를 붓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이건 빈소 모셔 보거나, 빈소 모시던 시대를 살던 사람의 글이 아니다.
(제사 이야기)… 생선은 잉어만을 제외하고 어떤 것을 써도 좋다.
(醜い韓国人 p221)
일본인에게는 잉어를 쓰지 않는 것이 신기할 테지만
한국인들은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생선을 써도 좋은 게 아니라, 비린 생선-‘치’자 들어가는 물고기는
쓰지 않는다. 역시 들은 풍월로 썼지, 제사 지낸 본 사람의 글이 아니다.
9. 한국인이라면 쓰지 않을 용어(用語)들
사소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쓰지 않을 용어들이 나온다.
‘이조 시대에 문렬공(文烈公)이란 경상 감사가 있었다.”(醜い韓国人 p208)
문렬공(文烈公)은 시호(諡號)다. 책에도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면 문렬공 아무개 라고 하지,
문렬공이란 경상감사가 있었다 라는 식으로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경어를 존댓말이라고 하는데…존대(尊大)하게 보여 주지 않으면..
(醜い韓国人 p129)
존댓말을 존대를 尊大로 착각하는 듯 하다.
尊待가 맞고, 1928년 생으로 서울대 다녔다면 모를 수가 없다.
이상 ‘추한 한국인’은 설정(設定) 또는 가장(假裝)한 저자 박태혁,
1928년 생, 인구 만명 농촌 출신으로 경성제대로 들어갔다가
서울대 다니던 사람의 글 일수가 없다.
번역본에 이건 일본인이 썼다고 해설하고도
너무나 뻔한 디테일을 상당수 놓친 것은
재일 동포가 분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以上
加瀬英明 - Wikipedia
'추한 한국인'의 진상 (95.4.22 보도) | SBS 뉴스
"추한 외국인"필자 의혹 짙었던 가세 히데아키 覺書 발견 | 中央日報
1993년 봄, 도쿄 ‘추한 한국인’ 날조사건을 떠올리다 < 사회 < 장슬기 기자 -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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